들녘의 포도넝쿨에서 열매 맺는 포도나무로
처음 요한복음 15장 1절을 읽고 받았던 충격을 여전히 기억한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하나님이 포도원 농부라고?
포도나무를 농작하고 포도밭을 관리하는 일에 관해 난 제법 친숙하다.
와인(wine, 포도주)에 푹 빠져 약 10여년을 공부했고, 특히 약 3년간 영국의 WSET Diploma라는 와인 전문가 과정을 공부하며 가장 중점을 두고 공부한 것은 ‘포도재배학(viticulture, 포도의 농작부터 재배까지를 다루는 농업학)’이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장을 1절부터 읽어가며 내 안에 떨림이 가득했다. 세상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포도밭 농부라면, 분명 최고의 포도밭 관리 비법이 요한복음 15장엔 들어있을 터이다. 과연 최고의 농부이신 아버지는 무엇을 하셨을까? 2절에 “아버지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고 하셨는데, 특별히 성경 주석에는 ‘손질하신다’에 헬라어(그리스어) ‘카타로스’라고 적혀있었다. 카타로스란 ‘깨끗하고 청결한’ 상태를 뜻하며, 친숙하게는 심리학 용어인 ‘카타르시스(정화 purification)’의 어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산 위에서 전하셨던 말씀(산상수훈)에서 팔복 중 하나에 해당하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구절에서 ‘청결한’에 사용된 단어다.
구절을 읽는 순간, 머리가 한 대를 크게 맞은 것 같이 울리며 ‘역시 하나님’이란 감탄이 나왔다. 순식간에 내 몸은 포도밭에 가 있었다. 포도재배학에서 가장 중요한 포도나무 관리 기법 두 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이견의 여지 없이 ‘프루닝(pruning)’과 ‘트렐리스(trellis)’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두 기법의 목표는 모두 포도나무를 ‘청결하게’하는 것이다. 포도나무를 청결하게 한다고? 깨끗하게 닦는다는 말인가? 포도나무와 청결이 무슨 상관이지?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포도나무를 조금만 관찰하면 그 답이 나온다.
포도나무는 유실수(有實樹), 즉 열매를 맺는 과수(果樹) 중에 몇 없는 넝쿨성 나무(vine)이다. 때문에 영어로 포도나무는 ‘나무(tree)’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포도넝쿨(grapevine)’이라 쓰거나, 더 흔하게는 넝쿨을 일컷는 명사 그 자체 ‘vine’을 써서 부른다. 포도밭 또한 직역하면 ‘넝쿨 밭’이라고 할 수 있을 ‘vineyard’란 단어를 사용하니, 포도나무가 넝쿨성 식물이란 것은 아주 주요한 특징인 것이다.
오래된 돌담 전체를 뒤덮은 넝쿨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넝쿨 식물은 왕성하며, 돌틈으로 뿌리를 내릴 정도로 생명력이 좋다. 일견 장점이긴 하지만 적절한 관리 없이 방치한다면 약한 건물이나 담을 훼손할 수 있을 정도며, 주변 식물의 광합성을 막거나 작은 나무를 무게로 쓰러뜨려 죽이는 등 생태계의 다양성을 저해하기도 한다. 더욱이 한번 군집을 이루면 제거할 방법도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적절한 때, 적절한 방법으로 관리가 필요하다. 관리가 제대로 되었을 때, 비로소 주변 생태계와 어울리고, 돌담과 다양한 모양의 구조물을 타고 오르는 아름다운 넝쿨이 되는 것이다. 열매를 맺을 필요가 없는 녹색의 넝쿨 식물이 이럴진대, 맛있는 열매를 맺어야하는 포도넝쿨은 어떨까? 여기에 포도 농사에 있어 프루닝과 트렐리스가 중요한 이유가 있으며, 포도나무 관리에 ‘청결하게 하다’는 단어가 잘 맞는 이유가 있다.
돌담 전체를 뒤덮은 넝쿨 식물
프루닝은 수확 후 겨울에 하는 가지치기다. 가지치기는 과일 나무를 관리할 때 꼭 필요한 기법인데, 생명력이 왕성한 포도 재배에선 거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프루닝은 다가올 봄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눈(bud)’이 달린 가지들을 자르는 일이다. 대체 왜 열매가 맺힐 눈을 잘라버리냐 되물을 수도 있다. 쉽게 생각하면 이렇다. 만일 첫 해에 포도나무에 3개의 눈이 있었고, 가지치기를 하지 않는다면, 다음해에는 각 눈에서 3개의 가지와 9개의 눈이 생긴다. 그렇게 하면 세번째 해에는 9개의 가지와 27개의 눈이 생기며, 네번째 해에는 무려 27개의 가지와 81개의 눈이 생길 것이다. 이건 단순화한 것이고, 현실은 더 복잡하다. 그랬을때, 눈 앞에 어떤 나무가 보이는가? 수많은 가지와 줄기가 뒤엉켜, 쓸데 없이 무성한 잎에, 왕성한 넝쿨과 쓸모없는 헛가지, 제대로 맺어지지도 않은 작은 포도들이 범벅이 된 볼품없는 들판의 넝쿨이 보이지 않는가? 과일나무의 목적은 좋은 열매를 맺게하는 것인데, 뿌리를 통해 흡수한 양분이 줄기와 잎으로만 가버리니, 생식생장이 아닌 영양생장을 하여, 맛좋고 건강한 열매가 아닌 작고 덜 익은 떫떠름한 들포도(사 5:2)만 산발적으로 맺히는 것이다. 때문에 포도밭 농부는 반드시 매년 겨울, 심혈을 기울여 프루닝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포도나무 관리의 묘미가 바로 여기 숨겨져 있단 점이다. 포도나무는 넝쿨과로 유연한 몸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과일나무들과 달리 농부가 어떻게 프루닝을 하느냐에 따라 몸체의 모양(수형 樹形)이 완전히 변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열매의 맛과 생산량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요컨대, 사과나무같은 두꺼운 나무들은 농부가 가지치기나 수형관리를 해도, 나무의 모양 자체를 바꿀 수 없다. 하지만 포도나무는 농부가 가지치기 방법에 따라 몸통(trunk)이나 원가지(cordon)을 나무처럼 두껍게 만든다거나 혹은 작게 만들 수도 있고, 가지를 한쪽 방향으로만 낸다거나 한 줄 혹은 두 줄 이상의 정렬로 하거나, 위로 솟은 나무 모양 혹은 엉켜진 넝쿨 모양 등 농부가 원하는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프루닝은 포도나무가 심겨있는 토양의 양분과 지형, 나무의 수세(樹勢)와 품종 특징 등을 모두 고려해 농부가 선택하는 것으로, 포도의 품질 뿐만 아니라 맛과 향을 결정짓는데 절대적인 요소다.
농부가 구사하는 프루닝과 트렐리스 기법에 따라 포도나무는 완전히 다른 수형을 가진다.
포도나무의 수형관리는 특별히 철사줄의 구조물로 형태를 잡아주는 트렐리스 시스템과 함께 극대화된다. 넝쿨 식물이 구조물을 타고 올라가는 습성을 활용한 것인데, 쉽게 말해 공원에 보면 철사줄로 하트나, 별 등의 모양을 잡아 넝쿨 식물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든 것을 떠올리면 된다. 공원의 구조물을 미관을 위해 설계된 것이지만, 포도재배에서 트렐리스 시스템은 포도나무와 포도열매의 건강함을 위해 설계된다. 넝쿨과인 포도나무는 제멋대로 무성하게 자라게 내버려두면 겹겹이 낮게 자라 햇빛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통풍도 되지 않아 곰팡이와 병충해에 시달리게 된다. 안 그래도 열매 자체도 껍질이 부드럽고 말랑하여 온갖 곰팡이성 질병에 취약한데 말이다. 때문에 포도나무에겐 환경과 품종에 맞는 최적의 형태의 구조물로 포도넝쿨에 길을 내어주는 훌륭한 농부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근처 나무를 타고 올라간, 잎이 무성하게 자란 야생 포도넝쿨
요한복음 15장 2절 포도나무 가지치기와 마태복음 5장 8절 산상수훈에서 ‘카타로스’란 헬라어 단어를 사용해 ‘청결하게 하다’라는 뜻을 쓴 것은 단지 ‘깨끗하다’는 것 이상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포도나무가 농부에 의해 가지치기가 된다는 것은, 온 몸의 수형과 몸체를 농부에게 맡겨 완전히 변화한다는 뜻이다. 농부 안에서 청결해짐으로써 포도나무는 비로소 정체성을 갖게 된다. 농부가 없는 포도나무는 과수(果樹)라는 정체성마저 잃은 들녘의 볼품없는 넝쿨에 불과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과 방식으로 포도나무를 빚어가는 숙련된 농부의 손에서 포도나무는 극상품의 포도를 생산하는 진정한 과수(果樹)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유능한 농부의 손에 맡겨진 포도나무는 극상품의 열매를 맺으며 비로소 과수(果樹)로 재탄생한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활동하신 로마 시대 기록에 따르면, 이미 당시 근동 지역에서는 포도나무의 특성을 이해한 프루닝과 기초적인 트렐리스 시스템이 사용되고 있었다. 근동, 특별히 포도 재배에 탁월한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에는 이미 수많은 포도밭과 포도밭 농부들이 있었으니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포도 농사에 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인 뿐만 아니다, 지중해성 기후의 그리스(헬라)나 로마제국의 시작점인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분명 이스라엘인과 헬라 문화권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포도나무를 청결하게 하다’는 뜻을 현대인보다 훨씬 제대로 이해했으리라.
성경에는 하나님을 목자로 우리를 양으로, 혹은 하나님을 포도밭 농부로 우리를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예가 많다. 재미있게도 양과 포도나무는 놀라울만큼 공통점이 많다. 양은 본인을 방어할 그 어떤 무기도 없는 굉장히 연약한 동물이다. 포도나무도 마찬가지다. 포도나무는 망고나무나 사과나무처럼 높지도 않고, 딸기나무처럼 가시가 있지도 않으며, 같은 넝쿨과 과일인 키위처럼 털이 나 있지도 않다. 아주 척박한 토양과 돌틈, 사막에서도 자랄만큼 생명력이 좋은 포도나무이긴 하지만 넝쿨식물로 낮게 열매를 맺는 까닭에 동물들에게 쉽게 짓밟히기도 하고, 충분히 익기도 전 먹혀버리며, 심지어 말랑말랑한 껍질을 가지고 있어 열매 자체의 보호막 마저 없다. 때문에 포도는 자연적으로 맺히긴 하지만 좋은 열매로 맺히기 어렵다. 연약한 양떼에게 반드시 목자의 인도와 보호가 필요하듯, 포도나무도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선 반드시 농부의 보호와 관리가 필요하다. ’목자 잃은 어린 양’에 버금가게 끔찍한 상황이 바로 ‘농부 잃은 포도나무’(사 5:5-6)인 것이다. 목자가 양의 털을 깍고 씻어주지 않으면 양의 털은 금방 더러워지고, 많은 털이 뒤엉켜 생명에까지 지장이 가듯, 농부가 없는 포도나무는 볼품없는 넝쿨나무가 되어 광합성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곰팡이 등의 병충해에 쉽게 시달리게 된다. 그럼에도 양과 포도나무 모두가 가진 엄청난 은혜는, 둘 다 주인에게 몸을 온전히 내어맡길 줄 안다는 사실이다. 양들이 신기하리만치 목자를 신뢰하고 의지하듯, 포도나무는 본인의 모든 몸체와 수형을 온전히 농부에게 내맡겨, 농부가 최고의 방식과 방법대로 빚어갈 수 있게 한다.
요한복음 15장의 신비는 놀랍게도 이제 시작이다. 일반 농부의 손에 맡겨진 일반 포도나무도 좋은 포도를 맺을진데, 하물며 예수님은 본인이 포도나무이며, 하나님이 농부라고 하신다. 예수님처럼 완전 무결한 흠없는 특상품의 포도나무가, 세상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한 최고의 농부의 손에 맡겨져서 맺는 열매란 대체 얼마나 귀하고 값진 열매일 것인가?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이미 내가 일러준 말로 청결하게 되어졌으니’ ‘나에게 붙은 가지가 되어 열매 맺으라’며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다는 점이다. 놀랍지 않은가? 가지는 그저 몸통에 붙어있기만 하면 된다. 열매를 맺기 위해 수고하거나 노력할 것도 없다. 다만 몸통에 딱 붙어 있으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미 이루셨고 이루실 최고의 열매를 누릴 수 있는데, 그런 어마어마한 자리에 우릴 초대하신거다. 이 ‘거저 주시는’ 은혜와 초대는 얼마나 놀라우며,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가? 이어서 예수님은 우리와 ‘한 몸’이 되어서, 주고자 하시는 것에 관해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가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더없는 사랑과 기쁨을,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가 한 몸인 것처럼 우리에게 나눠주시며 말씀하신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 거저받은 놀라운 초대에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누군간 여전히 들녘에서, 제대로 맺지 못한 작은 열매라도 지켜보고자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과거의 나처럼. 만약 그렇다면, 이 엄청나고도 신비스러운 초대를 한번 떠올려보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세상 가장 값진 곳으로, 거저 받은 초대를. 최고의 포도밭 농부에게 스스로를 맡겨, 볼품없는 들녘의 넝쿨에서 진정한 제 자아를 찾은 열매 맺는 과수로 거듭나보는 것이다.
이석인
홍콩에 7년째 거주 중입니다. <포도에서 와인으로>라는 책을 쓴 작가이며, WSET Diploma라는 자격을 가진 와인 전문가입니다. 때때로 강의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열매 맺는 삶을 꿈꾸는 크리스찬입니다.
seokyin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