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수난곡으로의 초대

한 5년 전쯤이었나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접하고 들어본 후 해마다 고난주간이 되면 틀어놓고는 했었다. 기도할 줄은 모르면서 일단은 찬양곡을 배경음악으로 틀어놓으면 마치 한듯한 착각이 생기는 것처럼 나 혼자만의 멋 부림이었을지 모른다. 독일어라 알아듣지 못했지만 작정하고 듣는 것도 아니었고 언젠가 자연스럽게 만날 날이 있을 텐데 굳이 보채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처음에는 아주 멀리에서부터 시작해 조금씩 다가가면서  '이건 뭐지?'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고 역시 하나가 궁금해서 찾아보면 두 개의 궁금증이 더 생기면서 난 아주 천천히 마태수난곡을 만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진호 목사님께서 쓰신 책을 통해서 40일간의 고난주간에 수난곡을 통해 묵상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책 표지의 이 그림을 보게 되었다. 원래 미술감상을 부담스러워해서 간단한 정보만 확인하고 바로 곡에 대한 설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고 당시 성가대를 함께 섬기는 대원들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단톡방에 마태수난곡을 올려보았으나 반응이 시원치 않아 아직은 아니구나 싶어서 바로 포기했던 마태수난곡.

Ash Wednesday by Carl Spitzweg

그렇게 주위만 서성거리던 마태수난곡을 2023년을 마감하며 새 해에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배경화면에 깔려있던 이 그림을 통하여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예전에 그냥 지나쳤던 책 표지그림이었는데 나를 잠깐 멈춰 세웠다. 왜 감옥에 풀 죽어 앉아 있는 광대의 그림이 어둡지 않고 이렇게 따뜻할까? 내가 그 곳에 앉아있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 울림은 뭐지? 


이 그림을 다시 보게 된 시간차 가운데 코로나가 있었다. 전 세계에서 격리가 가장 심한 도시 중 하나였던 홍콩에서는 여러 법률과 제도에 의해 아주 크게 생활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답답했다. 갑자기 가족과 함께 24시간 보내는 것도 당황스러웠고 이런저런 제약들이 매일매일 나의 삶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언제나 일이 생기면 그랬듯이 투덜거리며 그 변화에 적응해 나아갔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해방의 날을 기다렸고 남편이 출장도 가고 아이가 학교에도 가는 그런 날을 상상해 보며 딱 오늘 하루만 집중하고 살았다. 뭐 딱히 내일의/다음 달의/ 다음 해의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기에...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적응을 해 나가는 것 치고는 매일매일이 참 만족스럽고 보람찬 것 같은 기분은 무엇이었는지 잠자리에 들 때마다 마음이 참 포근했다.

격리 기간이 좋았던 이유 (1) 아침에 나만의 루틴을 가지고 평화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2) 수많은 제약으로 인해 꼭 만나야 하는 사람, 꼭 가야 하는 곳, 꼭 해야 하는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 (3) 독한 마음 없이도 갑자기 끼어들 사건이 없기에 꾸준히 무엇인가 할 수 있었다 (3) 이왕 세끼 해 먹어야 하는 음식이니 작정을 하고 달려들어 테이블세팅부터 다시 배울 수 있었다 (4) 관심 있던 분야의 자격증을 하나 따고 (5) 전에 없던 가족 간의 대화합으로 새 생명(강아지)을 품을 수 있었다 (6) 나와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즐거웠다.

격리시간이 정말 좋았던 진짜 이유 -  

난 코로나 감옥 안에서 광대옷을 입지 않아도 됐다.

비록 코로나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없어서 현재에 집중하고 마음이 느긋해지면서 모든 것이 단순해졌다. 그렇게 단순해지면서 내가 그동안 걸치고 다니던 광대의 옷과 사회적인 요구들로 어쩔 수 없이 걸쳐야 하는 공적인 모습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게 되면서 허물을 다 벗을 수 있었다. 없어도 되는 허물껍데기를 찾아낼 때마다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예쁜 것들은 물론 눈에 거슬리던 것들도 그냥 지그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자 아침마다 말씀을 읽고 들으면 생기려던 짜증도 금세 사라지고 '아 그랬구나!' 감탄사가 나오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기쁨이 차올랐다. 여행을 못 다니는 상황도 개인적으로 득이 되는 부분이 많았고 이만하면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갑작스럽게 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규제가 다 풀렸다. 갑자기 그 모든 규제가 다 풀렸다. 남들한테는 정상화였는데 나한테는 그냥 다시 새로운 변화가 찾아온 것 같았다. 세상은 아주 재빠르게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빠르고 강한 박자로 나를 맞이했다.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보상이나 보복을 원하듯 코로나 이전보다 더 많은 일들이 생겨났다. 저마다 모든 모임들을 알리는 단톡방의 카톡이 울릴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강제성이 클수록 스트레스가 커졌고 급기야 단톡방이 싫어서 ‘몰래 나가기' 기능이 생겼을 때 그 기능을 이용하려다가 앱 자체를 다 날려버린 적이 있는가 하면 잘 깔았다 싶어서 신나게 단톡방을 줄줄이 나갔는데 마지막 단계를 깜빡해서 정체가 노출되는 바람에 다시 소환된 적도 있다.

모임이나 사람들과의 만남이 두려웠고 내가 원래 관계를 이렇게 어려워하던 사람이었던가 고민하며 MBTI 분석도 다시 해보고 그냥 이 정도 나이에 시기적으로 비뚤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생각하고 넘겨보려고도 했다. 그럴수록 역시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격리시절 혼자만의 시간이 그리워 굳이 대낮에 수업을 신청하였고 최대한 고립을 선택했다. 전화번호를 아예 새로 바꿔버릴까도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선택한 고립은 코로나 감옥의 상황과 여러 가지로 달랐다. 따뜻하지 않았다. 코로나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는 창문으로 따뜻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규제가 풀린 세상에서 나는 해가 떠있는 하늘 아래에서도 애꿎은 내 그림자만을 쫓으며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쩐다…

목사님의 음성이 들린다. “그 마음 그대로 주님께 기도로 올려드리세요." 음 도대체 그 마음 그대로 주님께 올려드리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 양자역학만큼이나 아리송하다.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전자가 내가 쳐다보는 순간 전자의 위치가 바뀐다는 것만큼이나 내 마음은 내가 쳐다보는 그 순간 요리조리 피해 자리에 없는데 이 아리송한 마음을 어떻게 관찰하고 올려드려야 하는지 고민했다. (안타깝게도 이 글은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습니다!”하고 승리를 고백하는 글이 아니라 잠깐 멈추어 선 지점에서 주님의 초대를 받았다는 예고편 정도밖에 안 된다.)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by Jan Brueghel and Peter Paul Reubens

그러니까 아주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내가 광대 아저씨의 그림에서 멈추어 섰던 이유는 이것이 초대장이었기 때문이다. 기도로도 올려드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할 수 없이 2024년은 어떻게 보내야 하나 한숨을 길게 내쉬며 컴퓨터를 킨 나한테 주님이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볼래?" 하고 따뜻한 자리로 나를 불러주신 거다. 내가 견고하게 쌓은 차디찬 성으로 들어가 궁상떠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초대해 주시는 그 자리에서 마태수난곡으로 40일간의 묵상을 상상해 보니 참으로 설레었다. 혼자 할까 여럿이 할까 망설이고 있을 때 이석인 집사님의 신나는 권유로 여럿이 함께 해보기로 하고 제대로 언박싱을 하며 마태수난곡을 들어보고 또 들어보고 이내 빠져들어갔다.

아마 나와 똑같지는 않아도 코로나 격리기간으로 인해 혹은 그 풀림으로 인해 여러 가지 마음이 복잡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때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아득한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해의 시작이 부담될 수도 있는 시점에 연초의 들뜬감과 분주함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음악을 통해 묵상을 해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감히 마태수난곡 가이드를 자원해 본다. 5번째 복음사가로도 불리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으로 마태복음 26-27절 말씀을 듣고 거기에서 느껴지는 울림과 떨림을 통해 마음이 차오른 상태에서 부활절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2024년에 박자를 못 맞춰 넘어진다 하여도 그깟 광대의 옷이 몇 겹인들 뭐가 두려울까.

 
 

이주명

해외 거주 22년차. 홍콩에서 자유의 여신만 그리워하다 더 좋은 예수님을 만나고, 얼떨결에 반주자가 되어 매일 소소하게 일 저지르기 좋아하는 궁금이 이주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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